5장 좁은 골목길을 얼마 정도 걸어 들어가자, 발걸음을 멈춰 세운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 소녀: “아마 여길 넘어간 것 같아요.” 소녀가 서 있는 곳 너머로는 긴 철조망이 보였다. 철조망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대로라면 이곳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철조망에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 되는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고양이도 아마 이 구멍을 통해 철조망을 통과한 모양이었다. 소녀는 철조망 너머를 아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던 나는, 이 철조망이 E구역 경계선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 “들어가 볼래?” 소녀: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나: “아마도.” 소녀: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철조망도 쳐져 있잖아요.” 나: “괜찮을 거야. 아마 안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소녀: “정말요?” 나: “으응, 여기로 들어가면 E구역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E구역이라는 말에, 소녀는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녀는 철조망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철조망을 통과해 몇 걸음을 내딛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동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이 흘러가지 않았다면 시간이 멈추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풍경이었다. 소녀: “조용하네요.” 나: “그러게.” 불이 들어오지 않는 신호등. 의미가 사라진 정류장의 배차 시간표. 맥없이 점멸하는 네온 간판. 정적 속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차선과 도보의 경계 역시 의미를 잃어, 나와 소녀는 차로를 가로지르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종말을 맞이한 세계에 불시착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소녀: “꼭 영화 세트장을 둘러보고 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같이 봤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가 떠올랐는지, 소녀는 나와 비슷한 감상을 말했다. 나: “내일 곧장 세계가 멸망한다면 이런 모습이려나.” 소녀: “그럴지도요. 어쩌면 머나먼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소녀는 가볍게 웃었다. 소녀: “만약 이런 곳에 혼자 들어왔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나: “그건 왜?” 소녀: “왠지 예행연습이 되어버리는 것 같잖아요.” 나: “…….” 소녀의 웃음에서는 쓴맛이 묻어났다. 셔터가 내려져 있는 약국을 지나다 말고, 길을 걷던 소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소녀: “아까 나머지 사건 두 개는 여기서 일어난 거라고 했잖아요.” 나: “그랬었지.” 소녀: “어떤 사건들이었나요?” 나: “둘 다 살인 사건이었어. 연쇄 살인 사건.” 소녀: “아, 맞다. 그때 어렴풋이 봤던 기억이 나요. 범인은 아직 수배중이라고 했던가요.” 소녀는 처음 내 집에 들어왔던 날, 나와 함께 훑어보았던 자료를 기억해낸 듯했다. 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나: “으응. 범행 현장을 태워 버리는 바람에 흔적도 거의 안 남아서, 신원도 제대로 안 밝혀졌나 봐.” 소녀: “그래도 어쨌거나 이젠 그 범행 현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된 거네요.” 나: “뭐…… 그렇긴 한데, 정말 확인 해보려고?” 소녀: “그래야만 하는 거니까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소녀는 말하고 싶었던 거라 생각한다. 태블릿을 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이곳이 역외권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이야기했던 두 곳을 확인하는 것은 뒤로 제쳐두고, 나는 현지가 부탁했던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만한 장소를 찾는 중이었다. Y자 형태의 로터리에 접어들어 주변을 살피려는데, 소녀가 돌연 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소녀: “저기 봐요, 아까 그 고양이예요.” 소녀는 Y자 로터리의 왼쪽 길목을 가리켰다. 나: “어디? 어라, 정말이네.”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소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정말 아까 보았던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소녀: “어디로 가는 걸까요?” 나: “글쎄. 따라가 볼래?” 소녀와 나는 곧장 고양이의 뒤를 밟았다. 얼마 정도를 걸었을까. 어딘가에 도착한 검은 고양이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펜스를 훌쩍 타고 그 안으로 넘어갔다. 오래전에 폐쇄된 낡은 운동 경기장 같아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출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녹슬어 있는 손잡이를 밀자,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소녀: “들어가 볼 건가요?” 나: “응, 고양이도 안으로 들어갔잖아.”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무언가가 나를 안쪽으로 이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검은 고양이가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다고 하기엔, 너무 개연성 없는 게 아닐까. 안으로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이곳이 야구장이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초저녁의 야구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무래도 익숙한 편이라, 혹시나 이 바람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를 따라 그라운드를 밟은 소녀는 고양이를 찾으려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1루 쪽의 파울 라인을 따라 천천히 그라운드를 살폈다. 꽤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그라운드는 한참 색이 바래 있었다. 소녀: “아, 저기 있어요. 고양이.” 작동할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낡은 피칭 머신 옆에서, 소녀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그쪽으로 단숨에 달려간 소녀는 이번엔 고양이를 안아 드는 대신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털을 차근차근 쓰다듬었다. 자신을 쓰다듬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고양이는 풀어진 듯한 갸르릉대는 소리를 내뱉었다. 소녀가 고양이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동안, 나는 그라운드 전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렌지색으로 물들어가는 그라운드 한귀퉁이에서, 나는 오랜만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 ……? 그리고 그 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지만, 그 소리는 착각처럼 나의 귓가를 맴돌았다.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자 흙바닥과 신발 밑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해져 있던 기억 조각 중 하나가 빛을 되찾으려는 신호였다. ――― 누군가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바라본 내면의 세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로 뒤덮여 있었지만, 눈을 떠서 돌아본 주변은 당연하게도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외야 필드를 가로지르다 말고, 나는 소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생각해보니 지금쯤 터미널로 돌아가지 않으면 막차를 놓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소녀는 앉아있던 1루 쪽 덕아웃에서 조금 떨어진, 빛이 바래 경계선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대기 타석 부근에서 고양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소녀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더니 나에게 그쪽으로 다가오라는 손짓을 건넸다. 소녀: “여기 좀 보세요. 꽃이 피어 있어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곳에는 정말 푸른빛이 감도는 꽃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 있었다. 나: “정말이네. 사람의 손이 안 닿아서 그런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꽃송이를 바라보던 소녀의 단발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새까만 머리칼 틈새로 보이는 소녀의 표정은 마치 그때 가로등에 새겨졌던 작은 무지개 조각을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소녀: “예뻐요.” 이번에도 저번과 같은, 군더더기 없는 감상이었다. 소녀: “한 송이밖에 안 피어 있는 게 조금 아쉽지만요.” 소녀는 쓰다듬던 고양이를 내려놓고선 무릎을 털고 몸을 일으켰다. 나: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소녀는 안 그래도 그러려 했다는 듯 고양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고양이는 어느새 소녀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아쉬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막차가 도착하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기에, 나와 소녀는 조금 서둘러 그라운드를 빠져나왔다.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던 하늘에는 아까 보았던 고양이와 꼭 닮은 색이 덧대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차츰 드리워지는 거리를 걷던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를 알아채게 된다. 거리는 어둠에 잠겨가고 있었다. 도로마다 세워져 있는 가로등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폐건물에서는 불빛은커녕 소곤거리는 말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정표로 삼을 만한 기준점이 모두 사라진 듯했다. 나: “큰일났네.” 휴대용 태블릿은 이미 시계 역할을 겸한 손전등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에 접어들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아무래도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저희, 길을 잘못 든 것 같죠?” 나는 소녀를 향해 플래시를 비췄다. 나: “…… 그런 것 같네.” 불빛 속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 “어두워지니까 어디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소녀: “태블릿에 있는 지도를 사용하면 되잖아요?” 나: “보다시피. 완전 먹통이야.” 나는 소녀에게 신호가 잡히지 않는 태블릿의 상태를 보여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빵조각이라도 챙겨와서 뿌리며 다녔어야 했나. 시각은 여덟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터미널에서 막차를 타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더 난감한 상황인 것 같았다. 소녀: “으음……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라 잃은 거였네요. 그럼 어쩔 수――― 우앗―――” 길을 걷던 소녀가 어둠 속에서 잠깐 균형을 잃는다. 소녀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기에 아슬아슬하게 앞서 나의 손이 소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나의 손을 지지대 삼아 균형을 되찾은 소녀가, 내 쪽을 바라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 “…… 여기서 더 헤맸다간 날이 밝아서도 길을 못 찾을 수 있으니 근처에서 잠을 잘 만한 곳을 찾아보죠.” 나: “그래야겠다.” 손목과 얽혀있던 손은 자연스레 넘어지지 않기 위함을 핑계로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하게 되었다. 맞잡은 손에서 소녀의 악력이 평소보다 더 세게 느껴지는 듯한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마땅히 하루를 넘길만한 장소를 찾기 시작한 지 십여 분 만에, 나와 소녀는 근처의 마을 회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 회관 내부에는 제법 넓으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한 칸 있었다. 아마도 휴식을 위해 공공재로 사용되던 방인 듯 싶었다. 뭐, 어차피 사람이 없으니 무슨 용도였든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켜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전구에 달려있는 로프를 당기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왔다. 아마도 자가 발전기를 이용하는 거라, 나는 추측했다. 벽장에 들어있던 이불을 꺼내 두 사람 몫의 이부자리를 폈다. 소녀는 피곤했는지 곧장 이부자리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나는 서머 카디건을 벗어 두려다 말고 마음을 바꿔 다시 서머 카디건을 몸에 걸쳤다. 나: “잠깐 좀 나갔다 올게.” 소녀: “어디 가는 거예요?” 나: “어디 가려는 건 아니고, 그냥 근처만 둘러보려고.” 이부자리에 몸을 누여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를 뒤로 한 채, 나는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블릿의 플래시를 켜려 했는데, 어둠에 적응하기라도 한 건지 밤의 거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디건 주머니에 태블릿을 집어넣고 바라본 밤하늘에는, 누가 흩뿌려놓기라도 한 듯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많은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본 건. 혼자 보기엔 아까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옆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별빛이 되게 밝네요.” 어느새 마을 회관 밖으로 나온 소녀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러게. 나도 처음 봐. 밤하늘에 저렇게 별이 많이 떠 있는 건.” 정확히는, 처음 알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말이다. 나는 마을 회관에 들어오며 눈여겨 봐두었던 자판기 쪽으로 소녀와 함께 걸어갔다. 그곳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우리는 가만히 별빛을 감상했다. 기억 속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장면이었다. 나: “어제 비가 그쳐서 그런지, 하늘이 더 맑나 봐.” 소녀: “여기서 길을 잃지 않았다면, 이런 예쁜 풍경도 못 봤겠어요.” 나: “그렇긴 하네.” 소녀: “…… 다행이에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녀는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밝은 별빛이 아니었다면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희미한 미소였다.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는 별빛에 윤곽이 드러난 도로로 발걸음을 내딛으려는데, 소녀는 곧장 나의 옆을 따라붙었다. 소녀: “잠깐만요, 같이 가요.” 나: “피곤할 텐데, 굳이 안 따라와도 괜찮아.” 소녀: “어둡잖아요. 혼자 걷다가 실족사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요?” 나: “생각보다 별빛이 밝아서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실족사라니, 그건 좀…….” 소녀: “그렇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걸요. 그리고…….” 그리고? 소녀: “혼자 있으면 좀 그렇단 말이에요.” 나: “…… 알겠어.” 소녀는 다시 나의 손을 잡았다. 소녀: “어디로 가려는 건가요?” 나: “그냥 요 근처만 둘러보려는 거야.” 소녀: “뭔가 찾고 있는 거라도 있나요?” 나: “그렇기도 하고.” 그리 멀리 가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정말 말한 대로 주변만 슬쩍 둘러보려 했던 것뿐이었는데, 찾으려던 장소는 생각보다 금방 나의 눈에 띄었다. 마을 회관에서 고작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는 4층짜리 건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폐전신국인 모양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춰 세우고서는 그 자리에서 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하기에 괜찮은 장소 같았다. 작동하지 않는 자동문을 손으로 밀자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갈 틈이 생겼다. 소녀: “들어가려는 건가요?” 나: “응. 확인할 게 있어서.” 건물 내부의 모습이 플래시에 비쳐진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것을 증명하듯 건물 내부는 황폐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공포 영화도 아니고, 한밤중에 달랑 손전등 하나만 갖고 이런 폐건물 안을 어슬렁거린다니. 살짝 미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녀: “혹시 다른 귀신이라도 찾으려는 건가요?” 나: “아니. 그때 네가 오컬트부실에서 봤던 상자처럼 생긴 기계, 기억나?” 소녀: “네, 기억나요.” 나: “그걸 설치할만한 장소를 찾아야 해서. 마침 이 건물 옥상이 괜찮아 보였거든.” 소녀: “그랬던 건가요. 그런데 그건 어디에 쓰려는 물건인가요?” 나: “플랜 B라고나 할까. 나도 원리는 잘 모르지만, 들은 대로라면 그 기계로 너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소녀: “그런가요. 앗, 거기 조심해요―――” 소녀의 외침에 아래로 플래시를 비추자 널브러진 장비들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발걸음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찾기 시작했다. 소녀: “꼭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네요.” 나: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뭔가 이상한데.” 모퉁이를 돌아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찾은 나는 소녀와 함께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계단에서 일어나는 퀘퀘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옥상 문이 닫혀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잠깐 했지만, 다행히도 옥상 문은 열려 있는 채였다. 손잡이를 당기자 이번에도 삐그덕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적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고 밤하늘이 내려앉는 곳. 옥상이란 그런 장소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소녀가 밤하늘을 둘러보는 사이, 나는 폐전신국 옥상의 구조와 안테나의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좀 더 많은 양의 전파를 송수신할 수 있는,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만한 장소. 그런 장소를 어떻게 찾나 했는데, 신기하리만치 일이 잘 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 덕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발걸음을 돌려 바라본 곳에서, 소녀는 난간대에 기대어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선, 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생각에 잠겨있기라도 했는지, 소녀는 내가 바로 옆에 나타나고서야 나의 기척을 눈치 채고선 고개를 들었다. 소녀: “벌써 끝난 거예요?” 나: “으응. 사진은 다 찍었고, 애초에 금방 돌아가려 했었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소녀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래쪽을 힐긋 내려다보았지만, 옥상에서 바라본 폐도시의 조감은 그저 깜깜할 뿐이었다. 나: “그치만 잠시 바람 쐬다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나는 난간대 너머의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떼려는 소녀의 옆에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소녀도 내 제안이 싫지는 않았는지, 바라보던 곳을 향해 도로 시선을 옮겼다. 위와 아래가 뒤바뀐 듯한 풍경이었다. 가벼운 바람이 일어 소녀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그런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 “저기,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소녀는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였다. 나: “응. 뭔데?” 나 역시 여전히 그런 소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소녀: “당신은 제가 유령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요?” 소녀가 아까부터 생각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던 걸까.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흩날리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소녀와 시선을 마주친다. 나: “아니. 난 애초에 그날 너를 처음 봤는걸.” 딱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생각의 여지가 필요하다면 그건 대답에 대한 것이 아닌 소녀가 어떤 이유에서 저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겠지. 소녀: “그렇지만 아까, 제가 부실에서 봤던 기계가 유령을 소멸시키는 데에 쓰인다고 말했잖아요. 그렇다는 건, 예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걸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요?” 나: “그건 아냐. 설명하긴 좀 복잡하지만.” 소녀: “그런가요.” 나의 부실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금세 내 말에 수긍을 표했다. 나: “어라, 생각보다 빨리 믿네.” 소녀: “그쪽이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걸요.” 나: “그런가.” 왠지 머쓱함이 느껴지는 이유였다. 다시금 고개를 돌린 소녀가 폐도시의 새까만 풍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엔 별천지보다는 차분한 먹색 풍경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소녀: 실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혹시나 이 세계가 끝없이 타임 리프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소녀: 당신은 이전에도 몇 번이고 저를 구원하려 했었고, 그래서 저를 만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가 유령인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소녀: 그래서 미리 그런 기계를 만들고 있던 게 아닐까. 저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나: “그럴 리가 없잖아.” 소녀: “그렇겠죠?” 별빛이 너무나도 밝았기에, 나는 소녀가 희미한 웃음을 삼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 “하지만, 꼭 운명 같았으니까요. 여지껏 있었던 모든 일이요.” 운명이라. 그 순간, 운명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나: “그러게. 왜 하필 나였을까. 너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소녀: “…… 제가 평범했던 일상을 깨버린 거네요.” 나: “그럴 의도로 한 말 아니거든. 그냥, 궁금했던 거니까. 너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내가 왜 너를 볼 수 있는 건지 말이야. 그땐 짚이는 게 한 가지 있기는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잘 모르겠어.” 소녀: “짚이는 거요?” 나: “응. 그런 게 있어.” 소녀는 그 짚이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나: “그건 그렇고, 너는 어떻게 처음 보는 나를 덜컥 믿을 생각을 했어?” 소녀: “글쎄요, 그때도 운명이라 생각했던 걸까요.” 나: “그 운명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됐는데도?” 소녀: “그러게요.” 나의 어깨에 슬며시 몸을 기대는 소녀. 소녀: “―――” 분명 뭐라 소녀가 내게 말을 건넨 것 같은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전에도 자주 겪었던 감각이 심장으로부터 올라왔다. 무언의 아우성이다. 나를 과거의 한구석으로 불러내는 무언의 아우성. 나의 옆에 기댄 소녀는 그저 편안한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댔다. 더 이상 소녀에게 기대는 것을 허락했다간 괜히 심장 박동 소리를 들킬 것 같아, 나는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나: “이제 슬슬 돌아가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소녀에게 돌아가자는 손짓을 건넸다. 폐전신국에서 빠져나와 마을 회관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심장 박동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꾸만 들려오는 무의식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꼭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요란하게 들려오는 무의식의 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반복하는데, 옆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분명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기로 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 약속을 어기게 되네요.” 조금 허탈하다는 투로, 소녀가 이야기했다. 소녀: “그렇지만, 분명 언젠간 잊혀지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 않아’라는 이야기가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소리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절대 잊지 않아’같은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나는 분명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소녀를 언젠가는 잊게 될 것이다. 나를 이명처럼 맴도는, 기억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무언의 아우성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소녀: “그래도, 짤막한 추억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겠죠?” 소녀는 나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 고개를 들어 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잖아.” 그 대답이 소녀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을 회관에 다시 돌아온 우리는 곧장 이부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소녀는 몸을 몇 번 뒤척이더니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아침의 기운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배터리가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태블릿을 켜 시각을 확인했다. 일곱 시 삼십 분.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인적이 사라진 거리는 마치 지금이 그보다 이른 시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바로 옆의 이부자리에는 소녀가 곤히 잠에 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녀보다 일찍 일어난 건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았다.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자니, 터미널에서 밤을 지새웠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무방비한 상태다. 그리고 소녀보다 일찍 일어나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그런 소녀의 모습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몇 분 정도를 소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녀: “우음…….” 소녀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녀를 깨웠다. 소녀: “…….” 부스스 눈을 뜬 소녀가 눈가를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이 밝았음을 알아챈 소녀는 이부자리를 습관처럼 정리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는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어제 통과했던 그 철조망을 다시 넘어 F구역으로 돌아온 우리는 열차를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소녀가 만들어준 점심으로 허기를 채웠다. 오랜만에 소녀는 새로운 레시피를 떠올렸는지, 색다른 음식이 식탁에 내어졌다. 신기하다고나 할까, 어쩜 이렇게 매번 내 입맛에 맞는 음식만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다. 귀신에 쓰이기라도 한 걸까. 어쨌거나, 나중에 물어볼 레시피가 한 가지 더 생긴 것 같았다. 나: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만한 장소를 찾은 것 같아 샤워를 하고선 침대에 누워 태블릿을 만지던 나는, 현지에게 그런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자니, 절로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침대의 포근함을 즐긴지 1분 정도가 지났을까. 현지의 답장이 도착했다. 현지: 정말요? 현지의 답장이 온 것을 확인한 나는 찍어 놓았던 사진을 첨부해 회신을 보냈다. 나: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일 시간 있어? 답장을 기다리며 태블릿을 내려놓으려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묘한 위화감. 위화감의 정체를 찾으려 태블릿을 다시 확인하려는 찰나, 이번엔 문자 대신 전화가 걸려왔다. 현지의 전화였다. 현지: “말도 안 돼요. 선배, 어떻게 이런 곳을 하루만에 찾은 거예요?” 전화를 받자, 현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역시, 괜한 위화감이었던 거겠지. 나: “아,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보다, 여기 정도면 텔레이도스코프는 설치할 수 있을 것 같아?” 현지: “음, 이런 곳이라면 충분할 것 같아요.” 나: “그럼 내일 같이 가보자. 좀 먼 곳이긴 한데, 내일 시간 괜찮아?” 현지: “시간은 많아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예요?” 나: “잠깐만 기다려, 위치를 보내 줄게.” 현지에게 어제 확인했던 폐전신국의 위치를 전송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중, 옆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목에 두른 소녀는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침대에 걸터 앉아 머리를 마저 말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지: “에엣,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이잖아요.” 곧이어 현지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치고는 제법 반응이 크다고 해야겠지. 나: “그렇긴 한데…….” 현지: “그런 곳을 들어갔던 거예요?” 나: “우연히 들어가는 길을 찾은 것뿐이야. 그리고 딱히 위험한 곳도 아니고…….” 현지: “그렇긴 하지만…… 알겠어요. 만나는 건 몇 시 쯤이면 될까요?” 나: “아침 열 시 쯤, 그때 터미널 앞에서 만나자.” 현지: “그럼 그때 봐요~” 현지와의 짤막한 전화 통화를 끝낸 나는 옆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던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나: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소녀: “네? 뭐가요?” 나: “그거야 당연히…….” 소녀: “아아, 죽음의 색 때문에 그러는 거죠?” 정답이었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 어쩌면 여태껏 본 죽음의 색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녀: “괜찮아요. 잠깐인걸요.” 소녀는 수건을 내려놓으며, 자신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속은 가시 박힌 듯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뭐라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녀: “그런데 방금 통화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 “아, 전에 봤던 그 후배 여학생이야. 내일 같이 가자고 했어.” 소녀: “으음…… 그때 이야기했던 그 기계 때문인가요?”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을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던 소녀였지만, 이상하게도 현지의 이야기만 나오면 소녀의 얼굴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현지와 소녀의 첫만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단순히 소녀가 현지의 눈동자에서 죽음의 색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위화감이 들었다. 나: “…… 같이 가기 뭣하면 내일 안 따라 와도 괜찮―――” 소녀: “아, 아니에요. 문제 없어요.” 소녀는 손사래를 치며 나름 배려라고 이야기를 꺼내려던 나를 말렸다. 소녀의 새하얀 손이 내게 묻은 위화감을 지워내려는 듯 양옆으로 흔들렸다. 물론 그런다고 역력했던 위화감이 지워지는 건 아니었지만. 다음 날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어렴풋이 남은 위화감이 나의 몸을 가볍게 짓누르고 있었다. 터미널 한가운데에 걸려있는 전자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려는 찰나, 먼발치에서 가방을 멘 현지가 모습을 보였다. 아마 가방 속에는 텔레이도스코프가 들어있는 거겠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터미널 쪽으로 걸어오는 현지를 향해, 나는 묻어있던 위화감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평소보다 조금 큰 몸짓으로 팔을 흔들었다. 나: “여기야. 여기.” 손을 흔드는 나를 발견한 현지는 빠른 총총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내 앞에 도착했다. 정확히 열 시가 되려는 순간이었다.